종교/쿠르드

쿠르드족의 역사와 인권 현황

큰봄까치꽃 2012. 11. 13. 11:46

쿠르드족의 역사와 인권 현황 낙서장

2006/12/30 15:19

http://blog.naver.com/jhj7725/140032840416

쿠르드족의 역사와 인권 현황


이호택 -피난처 대표, 희년선교회 간사



1. 쿠르드족 현황


쿠르드족은 2300만-3000만의 인구로서 2000만이상의 민족 중 자신의 민족국가를 가지지 못한 세계 최대 유일의 민족그룹이다.

터키, 이란, 이라크, 시리아, 구소련에 접하는 쿠르디스탄 지역을 중심으로, 터키에 1,200만명-1500만명(터키인구의 약20%, 전체 쿠르드인의 절반), 이란에 약 500만명-800만명(이란인구의 약 7-9%), 이라크에 약400만 명, 시리아에 약120만 정도가 그 외에 레바논(13만), 아르메니아(6만5천), 그루지아(3만5천),카자흐스탄(3만), 아프가니스탄(3만) 아제르바이잔(1만5천)과 영국, 독일, 스웨덴, 네덜란드, 프랑스, 호주, 미국 등 유럽과 세계각지에 난민으로 흩어져 살고 있다.


쿠르디스탄 지역은 북쪽과 북동쪽으로 평균고도 해발 3500미터의 스텝과 같은 고원 산악지대, 티그리스강과 유프라테스강의 수원지가 되고 있는 거대한 반(Van) 호수 북쪽 평원지역, 이라크 북부의 유전지대로 구성되는 석유 등의 지하자원과 수자원의 보고이며 농경에 좋은 땅으로서 주변 강대국의 분할통치의 대상이 됨으로써 쿠르드족의 독립이 방해되고 있다.


한국에도 터어키 쿠르드 약1000명, 이란 쿠르드 약500명, 이라크 쿠르드인 3명 등 약 1500명의 쿠르드인들이 있으며, 이라크 출신의 쿠르드인들은 사담 후세인의 박해와 이라크전을 이유로 , 이란 쿠르드인들 중 일부는 기독교 개종을 이유로 난민인정을 신청한 바 있다. 2002년 8월 11일부터 희년선교회에서 재한 쿠르드인 모임이 시작되었고, 매주일 오후 2시부터 4시까지 모임을 갖고 있다. 현재 2명의 이라크 쿠르드인과 10여명의 이란 쿠르드인이 모임에 참여하고 있다.




2. 쿠르드족의 역사


가. 근대이전


(1) 메데 (쿠르드)

BC 727년에 형성된 구약성서의 메데왕국이 쿠르디스탄을 중심으로 세워진 쿠르드인의 왕국이라고 한다.


(2) 페르시아 (이란)

마지막 왕인 Rshti-vega Azhi Dahak(BC 584-549)는 아들이 없어서 그의 딸을 페르시아 장군에게 주었고 그들 사이에서 난 외손자가 메데-파샤제국을 세운 키루스(Cyrus, 구약성서의 고레스)왕이다. 이 시기 이 지역의 천사(사탄)숭배는 초기 조로아스터교의 태동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BC 3세기에 페르시아는 파르티아라는 이름의 연방국으로 형성되었는데, 그 연방 안에서 쿠르드인들은 타민족의 오랜 지배하에서 벗어나 반독립을 이루게 되었다. AD 3세기에 파르티아제국이 패망하고 사산조 페르시아 제국이 일어났다


(3) 이슬람 (아랍,이라크)

7세기에 이슬람이 발흥하고 아랍세계가 정복전쟁에 나서자 쿠르드지역이 아랍군에게 정복당하여 쿠르드인들은 이슬람을 받아들이기 시작했고 쿠르드는 최초로 이슬람으로 개종한 이민족이 되었다.


(4) 오스만투르크 (터어키)

그 후, 우마이야 왕조, 압바스 왕조의 아랍제국을 거쳐 튀르크족의 셀죽, 티무르, 오스만 제국의 통치하에 놓이게 되었다. 11세기 말 압바스 왕조의 쇠퇴를 틈타 수많은 쿠르드 공국들이 난립하여 일시 독립을 이루기도 하였으나 이러한 간헐적인 독립은 중앙 세력이 약할 때 주위 세력과 연합해서 이루어낸 자치일 뿐이었으므로 쿠르드인들은 계속해서 타민족의 지배를 당하였다. 결국, 1639년 오스만 제국의 술탄 무라드(Sultan Murad)와 사파비조의 샤 압바스(Shah Abbas) 사이에 맺어진 국경선 조약을 통해 쿠르디스탄 지역은 두 구역으로 양분되고, 이때부터 쿠르디스탄에는 고립된 산악지대를 중심으로 수많은 부족적 자치소국(自治小國)이 등장했으나, 19세기까지는 터키, 이란, 러시아 간의 지리적 완충지대의 기능에 머물렀다.



나. 근대이후


(1) 쿠르드 민족국가 창설 시도 (우베이둘라, 터어키 이란)


최초로 쿠르드인의 정치적 민족주의가 발아하는 시기는 1880년이었다. 이 해 쿠르드 족장 쉐이크 우베이둘라(Sheikh Ubaidullah)가 이란을 침공한 대가로 오스만 정부로부터 쿠르디스탄의 일부를 할양받았고 이란 영내의 쿠르디스탄에 일종의 쿠르드 민족국가를 설립하였다. 그는 8만의 강력한 쿠르드 연합군을 결성해서 계속해 이란을 침공하여 마하바드(Mahabad)를 점령하고, 한때 우르미아(Urmia)호수의 서안, 레자이 지역까지 진격했으나 앗시리아 네스토리우스 교도의 저항과 이란 정부군의 반격으로 민족국가 창설의 꿈을 실현시키지 못했다. 그러나 우베이둘라의 민족국가 창설 이념은 이후 쿠르드 민족주의 탄생의 기폭제가 되었다.


(2) 1차대전과 쿠르디스탄의 분할


1차 세계대전때에 쿠르드족은 이슬람 형제라는 이름으로 터어키군에 편입되어 터어키에 이용당하였고, 러시아와 터어키 사이의 전쟁은 터키의 쿠르드인들과 기독교 아르메니아와의 대리전이 되었다. 1차 세계대전에 패전한 오스만투르크를 응징하기 위하여 1920년 체결된 세브르조약에서 쿠르디스탄은 터키, 이란, 이라크, 시리아, 소련 등 5개국에 편입되고, 쿠르드인의 자치권 보장이 인정되었다. 그러나 조약에 반대하는 케말 파샤를 중심으로 민족운동이 일어나 터키-쿠르드 연합군이 그리스군을 격파하여 투르크 정부를 폐지하고 터키공화국을 수립한 후, 무스타파 케말은 쿠르드의 독립을 인정하지 않는다고 선언하였다. 쿠르드는1922년 6월 독립을 추구하는 봉기를 일으켰다. 그러나 쿠르드족이 거주하고 있던 이라크 북서부 모술 지역은 유전지대이기 때문에 영국이 개입하여 무력으로 쿠르드족 봉기를 진압하였다. 1923년 7월 24일 세브르 조약을 대신하는 로잔조약을 체결되었으나 터어키의 반발과 영국의 이권에 의해 쿠르드 문제는 언급조차 되지 못하였고, 결국 쿠르디스탄은 터키, 이란, 이라크, 시리아, 소련 등 5개국으로 나뉘어 졌다. 쿠르드족은 1930년 6월에는 이란과 터키 국경에서 봉기를 일으켰으나 두 나라에 의해 진압되었으며, 1932년 4월에도 반란을 일으켰다가 영국군의 지원을 받는 이라크군에 의해 제압되었다.


(3) 2차대전과 최초의 쿠르드공화국


쿠르드 민족운동은 2차 대전 이후 소련이 이란을 점령했을 때 다시 일어났다. 소련의 도움을 받아 1946년 1월 24일 마하바드에서 카지 무함마드를 대통령으로 최초의 쿠르드 공화국이 세워졌으나 11개월만에 소련의 묵인하에 이란 정부군에 의해 무너졌다. 쿠르드족은 자신들이 거주하는 국가 내에서 혼란이 발생할 때마다 분리 독립을 요구하였고, 그 때마다 정부군이 그들을 무력으로 진압하여 왔다. 터키에서는 1951년과 1965-1968년에, 이라크에서는 1958년과 1970년 ,1978년, 1991년에, 이란에서는 1950-1953년과 1970년 및 1979년에 쿠르드족 문제로 인한 분쟁이 발생되었다.




3. 각국 쿠르드족의 인권현황


가. 터키 쿠르드족


6천8백만 터키인구의 약 20%인 1,200만 정도가 쿠르드족이며 주로 동남부지역에 살고 있다. 1923년 오스만터어키를 폐지하고 터어키공화국을 연 터키 건국자 무스타파 케말은 공화국 초기부터 Kemalism으로 통칭되는 터키화 정책을 취하여 쿠르드족의 주권을 말살하였다. 1991년까지 쿠르드어는 어떤 용도로든지 사용이 금지되었으며 이러한 터키화 정책에 의해 많은 터키 쿠르드인들은 터키 민족에 동화되었다. 쿠르드족의 분리 독립운동은 1984년 4월 '쿠르드 노동자당'(PKK)이 창설되어 무장투쟁을 벌이면서 활발하게 전개되기 시작하였다. PKK의 사령관인 오잘란(Abdullah Ocalan)은 이라크와 터키 국경지역에 독립국가를 건설하기로 하고, 3000명의 국내 게릴라로 7000명의 해외 쿠르드병력으로 이라크군 및 터키군을 공격하였다. 그들은 이라크군과 터키군에 비하여 절대적으로 열세에 있었기 때문에 도시지역에서는 테러전을 산악지대에서는 게릴라전을 전개하였지만, 1984년 봄철 전투에서 쿠르드 게릴라 측 2700명이 사망하였고, 터키군과 이라크군에서도 수백 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이라크에서는 1975년 노선차이로 친이라크계인 온건파 쿠르드 민주당((KDP)과 친이란계인 쿠르드 애국동맹(PUK)으로 세력이 갈라져 있었다. 이라크와 터키 정부는 1990년 이들 온건 및 중도파 쿠르드 세력과 협상을 진행하면서도 PKK에 대해서는 철저히 탄압한다는 방침을 견지하였다. 이라크의 후세인 대통령은 1980년부터 8년간 이란과의 전쟁을 치르는 과정에서 1988년 쿠르드족 촌락에 화학무기를 사용하여 국제적 비난을 무릅쓰면서까지 쿠르드족을 탄압하였으며, 터키도 PKK 거점에 대해 지상군뿐만 아니라 공군까지 투입하여 공격을 가했다. 이라크와 터키는 1991년의 걸프전을 전후하여 대립관계에 있었으면서도 PKK 공격에 대해서는 공동으로 보조를 취하였다.


터키와 PKK간의 무장 대립은 1992년부터 한층 더 격렬해졌다. PKK는 터키 남동부 지방을 중심으로 군과 치안기관 시설을 여러 차례에 걸쳐 로켓탄으로 공격하였다. 이에 터키군은 동남부 지방에 병력 15만 명을 배치하는 한편, 이라크 영토 내로 병력 2만 명을 월경시켜 PKK 거점을 집중적으로 공격하였다. 전세가 불리해지자 PKK 사령관 오잘란은 1993년 터키 정부에 대해 일방적으로 휴전을 선언하고 쿠르드 국가 독립 요구를 일시적으로 보류하면서 대화를 통한 분쟁 해결을 제안하였다. 그러나 PKK 내의 강경파가 이에 반대하면서 5월 독단적으로 전투를 재개하고, 터어키 재외공관까지 습격하면서 터키 정부도 다시 강경한 탄압 쪽으로 전환되었다. 유엔의 추정에 의하면, 쿠르드족과 이라크 및 터키간에 무력 충돌이 본격화된 1984년부터 10년간 쿠르드인 4만 명(터키 내무성 발표는 1만 명)이 희생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쿠르드족 분리 운동은 1999년 2월 PKK 반군 지도자 오잘란이 케냐에서 체포되어 터키로 압송되면서 새로운 국면에 접어 들었다. 격렬한 항의 시위가 지속되었고 시위는 유럽의 여러 국가의 터키 대사관 난입으로 이어졌다. 터키 정부는 강경정책을 지속하여 PKK 반군 대규모 소탕작전을 실시하는 한편 PKK는 독립 전쟁 총 공세를 결의하였다. 그러나, 그 해 6월 사형 선고를 받은 후 오잘란은 PKK 반군에게 전쟁 종식과 터키 영토 내 철수 및 터키군에게 항복을 명하였다. 그 결과 일부는 항복하였으나 대부분은 이라크와 이란의 거점기지로 이동하여 반군활동을 지속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이라크 북부지방에 거점을 갖고 있는 쿠르드민주당(Kurdistan Democratic Party: KDP)과 교전이 발생하기도 하였고, 터키 정부군이 PKK 소탕을 위해 이라크 북부지방으로 월경하기도 하였다.


PKK에 대한 무력 소탕과 더불어 터키는 2001.9.26. 쿠르드족 문화적 특성을 인정하고 언어사용을 허용하는 법개정안을 통과시키는 유화조치도 내놓았다. 쿠르드인들이 정부에 반하는 감정을 가지는 이유는 쿠르드인 거주지역인 터키 동남부의 경제적 저개발로서 이러한 사회적 여건이 PKK를 지원하는 한 요소가 되었으므로 터어키는 이지역 개발에 노력하고 있다. 나아가 터키는 북부이라크 지방에 쿠르드족 독립국가 건설 가능성에 대하여 큰 우려를 가지고 있다. 미국의 이라크 공격 와중에 쿠르드족이 북부이라크에 독립국가 건설을 시도할 것을 우려하여 여러 차례 이를 허용치 않겠다는 성명을 발표하고 이라크 파병을 고려하기도 하였다. 이에 대해 이 지역에서 활동중인 KDP와 PUK는 독립국가를 건설하지 않을 것이라는 성명을 여러 차례 발표하면서 터어키의 파병을 반대한 바 있다.


미국과 EU는 PKK를 테러단체로 규정하고 있다. 사실 PUK는 쿠르드 민족운동 뿐만 아니라 막스-레닌주의에 기초한 반봉건,반식민,반계급 이념노선을 가지고 있으며, 게릴라적 투쟁방법을 사용하고 있다. 이들은 하층민 터어키쿠르드인을 지지기반으로 삼고, 공산주의 이념에 기초하여 다른 어떤 조직보다 더 많은 여성전사들을 보유하고 있기도 하다.



(2) 이라크 쿠르드족


2300만 인구의 15-20%인 400만정도인 이라크의 쿠르드족은 민족의 주권을 위해 가장 많이 싸웠고 북부지역 쿠르디스탄에서 어느 정도의 자치권을 인정받은 쿠르드족 집단이다.


고대 메소포타미아문명과 바벨론왕국의 땅이었던 이라크는 페르시아,압바스왕조,몽골,오스만터어키의 지배를 받았으며, 오스만터어키가 1차대전에서 몰락하자 민족운동이 일어나기 시작하여 1932년 영국의 위임통치에서 벗어나 독립하였다.


영국이 아랍민족주의를 무마하기 위하여 1921년 탄생시킨 입헌군주제 하심(Hashimite)왕가 이래 1958년 혁명 전까지는 친미·친서방 국가였다. 그러나 1958.7.14. 까심(Abd al-Karim Qasim)장군의 군사혁명으로 왕정이 타도되고, 공화국으로 정치체계가 변화되었다. 이후 1968년 바트당이 집권한 바크르 장군의 쿠데타까지 3 차례의 정권 교체가 있었다.


쿠르드민주당(KDP)은 1946년 물라 무스타파 바르자니가 술라마니에서 이란KDP 이라크지부를 개설하면서 창설되었다. KDP는 1961년부터 군사정권에 대한 무장투쟁을 개시하고 1964년에 바르자니가 ‘페쉬메르가(결사대)‘라는 2000명의 전사들을 기반으로 KDP 지도권을 쟁취한다. 한편, 이브라힘 아무드를 따르던 다른 KDP분파는 이란으로 건너갔다가 이듬해 돌아오는데 이들이 모태가 되고 이란의 쿠르디스탄 독립운동인 Komala의 이라크지부, KDP의 사회주의 분파, 탈레반분파 등과 연합하여 1976년 쿠르드애국당(PUK)이 창설된다. KDP는 1968년 집권한 바트당의 바르크 정부와 싸워 1970년 정부와의 자치 협상에서 쿠르드어 교육과 교육어로서의 쿠르드어 사용을 쟁취한다. 정부는 1974년 자치법을 공표하여 이라크 북부의 쿠르드 지역에서 쿠르드족이 자치를 누릴 수 있도록 회유하였다. 그러나 이라크 쿠르드족은 자치지역내에 키르쿡(유전지대)이 포함되지 않은 것에 불만족하여 1974.3.부터 이란왕과 연결하여 저항운동을 시작하였다.


이라크 정부는 회유책에도 불구하고 쿠르드족의 민족 저항운동이 제압되지 않자 1975.3. 알제리 이슬람국정상회담에서 이란이 이라크 쿠르드를 지원하지 않는 조건으로 이라크가 걸프지역 양국 국경지대인 샤트 알-아랍(Shatt al-Arab)수로 국경을 양보하는 국경협정을 체결한 후 쿠르드족에 대한 강경 정책을 취하기 시작하였다. 이무렵 쿠르드인들은 친이라크계인 쿠르드 민주당((KDP)과 친이란계인 쿠르드 애국동맹(PUK)으로 노선이 갈라져 세력이 약화되었다.


1979년 사담 후세인(Saddam Hussein)이 바크르 대통령으로부터 정권을 인수하여 이라크의 대통령직에 오르고 아랍세계의 패권을 추구하면서, 1979.2 팔레비왕정을 무너뜨리고 회교공화국을 세운 후 혁명수출정책을 추구하던 호메이니와 충돌한다( 이란 호메이니의 1979.2. 회교혁명 직후 시아파 지도자들은 걸프연안 왕정국들에 거주하는 다수파인 순니파가 시아파 무슬림들의 자유와 권리를 억압하고 있다며, 시아파 무슬림들이 일제히 봉기하여 걸프연안 왕정국가들을 타도하라고 부추기며 혁명수출정책을 폈다). 이라크는 알제리 협정의 폐기와 샤트 알-아랍(Shatt al-Arab)수로 국경조정 및 호르무즈 해협의 3개 도서 반환을 요구하며 이 란을 침공하여, 1980부터-1988까지 8년간의 이란-이라크 전쟁이 일어났다.


전쟁중 미국이 이란의 이라크 공격을 묵인하면서 이라크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서 이란에게 쿠르드반군을 원조하도록 부추기자 이라크의 사담후세인은 1987년부터 1989년 사이에 안팔작전(Operations Anfal)이라는 쿠르디스탄 초토화 작전에 나서 5,000개 이상의 쿠르드족 촌락을 초토화하였으며 20만 명을 학살함으로써 수많은 난민이 발생하였다. 특히 이 안팔작전 기간인 1988.3.에 사담 후세인은 화학무기를 사용하여 할랍자 마을 전주민 5000여명을 5분 안에 즉사시켜 세계를 놀라게 하였다. 최근 이라크 남부 사우디와의 국경 누그라 살말 사막지역에서 25,000명으로 추정되는 거대한 쿠르드인들의 무덤이 발견되었다.


1990년 걸프전을 계기로 대규모 쿠르드 독립운동 일어났고 이라크군은 다시 강경 진압하여 약250만명의 쿠르드 난민이 발생하였다. 이 때 발생한 난민들이 세계 각국에 흩어져 우리나라에까지 오게 되었고, 대부분은 터키와 이란의 국경지대 천막촌에서 국제 구호기구의 구호물자로 연명하였다. 걸프전을 계기로 북위 36도 이북의 쿠르디스탄지역은 비행금지구역으로 설정되어 이 지역 쿠르드인들은 서방의 도움으로 자치 정부를 꾸려나갈 수 있게 되었다. 걸프전 종전무렵 KDP와 PUK가 연합하여 쿠르드전선(Kurdistan Front)을 형성하여, 사담후세인정권과 터어키 및 터어기지역 쿠르드 독립운동집단인 PKK에 대항하였으나, 1994.5. 다시 분열되었으며, 1995.5.터어키가 북부 이라크를 침공하자 다시 연합하였고, 현재 PUK는 술리마니아 지역과 지식인 및 중산층 쿠르드인을 근거로 탈레반의 영향하에 있다.

2003년 3월 20일 이라크전에서 쿠르드인은 미국에 가담하여 사담후세인정권을 축출하였지만 쿠르드인의 자치가 어느 정도 보장될지는 아직 분명하지 않다.



(3) 이란 쿠르드족


6800만 인구의 약 7-9%인 500만-800만 정도의 쿠르드인이 이란의 서부 이라크 및 터어키 국경지역과 이란의 북부 호라산 지역으로 크게 두 지역에 거주하고 있다. 이란의 마하바드에서는 과거 1946년에 쿠르드 국가가 11개월간 수립되었던 적이 있다. 마하바드세넨다즈와 함께 이란 쿠르드지역의 중심도시이다.

이란은 고대 페르시아 제국을 형성하였으며, 그리스, 아랍, 터키 및 몽고 등의 지배를 받았고,19세기에는 영국과 러시아 세력의 각축장이 되었다. 1925년에 팔레비 왕조(1925-1979)가 건국되었고, 1935년에는 페르시아에서 이란으로 국호를 변경했다.

이란에서는 1961년 서구화 지향의 백색혁명이 추진되었고, 1970년대 미국의 이란 중시 중동정책으로 이란은 OPEC및 중동지역 중심국가로 부상하였으나 팔레비 왕권의 권위주의적 통치에 따른 국정운영의 비민주성, 지나친 친서구화 정책과 정교 분리로 인한 성직자의 사회적 지위저하와 이에 따른 성직자 들의 불만 고조, 급속한 경제성장에 따른 빈부격차 심화 등으로 위기가 가중되어, 결국 반백색혁명 주도한 아야톨라 호메이니가 1979. 2 회교혁명으로 정권을 장악하고 회교 공화국을 수립하였다.


이란 쿠르드족은 팔레비 왕정 치하에서 심하게 탄압받았다. 그래서 1979년 호메이니 이슬람 혁명은 이란의 쿠르드족에게 큰 희망을 주었고 쿠르드인도 이 혁명을 도왔다. 그러나 호메이니 정권은 혁명에 열렬하게 동조했던 쿠르드족의 열망을 무시하고 일체의 쿠르드 독립시도에 단호히 대처할 것임을 경고하였다. 호메이니 정부는 범이슬람 주의를 내세워 소수민족의 주권을 인정하지 않았다. 이슬람 주의는 민족적 구별, 사회 계층적 구별 없이 무슬림으로서 모두가 평등하다는 논리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민족의 주권을 주장하는 쿠르드족을 용인할 수 없었다. 1979년에 이란쿠르드민주당(Komala)과 Fadayan 쿠르드지부가 결성되자 호메이니는 이를 무력으로 진압하였으며, 이란-이라크 전쟁이 일어나자 더욱 심화되었다.


Human Rights Watch 보고서(1996.12.)에 의하면, 1980년부터 1992년 간에 271개 이상의 이란 쿠르드마을이 파괴되고 주민이 내쫒겼으며, 쿠르드 무장투쟁군에 대한 집중적 공격이 있었던 1993년 7월과 12월 사이에만도 113개의 마을이 폭파되었고, 쿠르드인들이 쫒겨간 마을에 지뢰가 매설되고 있다고 한다. 1992년에 베를린에서 이란정부요권의 조종에 의하여 고위 쿠르드지도자들이 암살된 것으로 밝혀진 것을 비롯하여, 쿠르드단체들은 264명의 쿠르드인이 이란정부에 의하여 살해되었다고 한다(2002.11).


이란은 쿠르드족의 민족 저항운동에 대해서 강력히 탄압하고 특히 지도자를 암살하는 수법으로 대항하고 있다. 이러한 전략은 효과를 발휘하여 현재 이란내에서 쿠르드족의 민족주의 운동은 수그러들었고 겉으로 보기에 평안해 보인다. 쿠르드족 출신의 국회의원들이 있으나 쿠르드당은 금지되고 있으며, 2000년 말 이란의 쿠르드지역출신인 6인의 국회의원이 쿠르드인 특히 순니파 쿠르드인에 대한 탄압과 살해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고 2001년 10월 집단사퇴함으로써 이란내 쿠르드인의 인권문제가 다시 한번 논란된 바 있다.


이란은 쿠르드족 선교에 있어서 관문국가라고 할 수 있다. 이란의 국어인 페르시아어는 쿠르드어와 같은 친족언어이며 이란인들은 쿠르드인들과 인종적으로도 가깝다. 또한 역사적으로 문화적으로 많은 부분을 공유한다. 한편 이란은 이라크 쿠르드족 난민들을 위해 가장 활발히 구호 활동을 하는 나라이며 이러한 활동들을 통해 이란의 이슬람 주의를 쿠르드족에게 전파하고 있다. 이란 국경지대의 쿠르드족 사회에는 현재 이슬람 부흥 주의가 크게 확산되고 있다.


(4) 시리아 쿠르드


120만정도의 쿠르드인들이 알리보, 하사가(시리아 최대유전지대) 등지 북동부 접경(터어키,이라크) 쿠르디스탄 지역에 살고 있다(쿠르드 도시 중 큰 가마실리에는 99 퍼센트가 쿠르드인, 아무다에는 95 퍼센트, 아프린에는 많은 작은 쿠르드마을들이 있다.)


1963년 시리아 신정부 수립 이후 시리아는 71년 평양에 대사관을 개설하였고 북한은 1996년 시리아와 국교를 수립하고, 동년 10월 시리아에 북한대사관이 설치하였다. 한국은 시리아와 외교관계 수립을 추진 중이나, 북한과의 친밀관계로 인해 현재까지 정치 외교적으로 큰 진전이 없는 상태이다.


시리아 대통령 Hafez Asad는 사담 후세인 못지않게 잔인하고, 확실하게 정치적 이해를 추구하는 사람으로서, 쿠르드인의 자유와 언어와 역사를 말살하는 만행을 저질러왔으며, 시리아내 쿠르드 민족운동을 억누르고 반터키정책을 조장할 목적으로 시리아 쿠르드인들이 시리아 군대에서 복무하는 대신에 PKK군대에 복무하고 훈련받도록 허용함으로써 시리아 내 쿠르드 민족주의자들을 터키로 내보내는 등의 지능적이고 교활한 방법으로 쿠르드족을 통치하고 있다.


시리아 바트당 정권은 1960년대 초에 15만 쿠르드인들의 시리아 시민권을 빼앗고 수천명 이상을 국외로 추방한 이래 현재까지 40-50만 쿠르드인의 시민권을 박탈하였으며, 그들을 아랍족으로 대신 배치하였다. 국토 개혁이라는 미명하에 거대한 아랍화 계획이라는 이름으로 시리아 쿠르디스탄에 아랍족을 이주시키고 쿠르드인의 토지를 강제로 양도시켰다.

그리하여 시리아 쿠르드인은 시민권이 있는 사람과 시민권을 박탈당한 사람이 있으며, 시민권을 박탈당한 사람중에는 외국인으로서의 붉은 신분증(여권을 발급받지 못함. 공무원이 될 수 없음, 쿠르드인 이외의 결혼을 할 수 없음. 그 소생의 자녀는 신분증명이 없으므로 결국 학교도 가지 못함,쿠르드인 자신의 이름으로는 어떤 재산도 소유할 수 없음)을 가진 하사카의 외국인그룹과 일체의 신분증이 없고 불법체류자 취급을 받는 5-6만의 맥토민 계층(어떤 신분증도 없음. 학교를 갈 수 없음. 합법적 취직 불가능. 공무원이 될 수 없음. 여행 불가, 불법으로 고된 일을 하게 되어있음. 동산, 부동산 소유 불가. 합법적 결혼 불가. 따라서 몰래 결혼하게 되고 결국 자녀 역시 학교갈 수 없음. 가장 박해를 받음)으로 나누어져 있는 상황이다.




4. 쿠르드족 문제의 성격과 전망



쿠르드족은 국가 없이 중동지역 또는 여기 저기 세계에 흩어져서 남의 나라에서 난민으로 혹은 난민과 같이 거주하고 있다는 점에서 중동지역의 다른 난민문제인 팔레스타인 문제와도 유사하다. 그러나 팔레스타인인들이 아랍인으로서 광범한 민족적 유대감을 가지고 있고 아랍국가들의 지원을 받고 있다는 것과 달리 쿠르드족은 외톨이 민족이다. 쿠르드족은 순니파 이슬람을 신봉하고 있으면서도 민족적 이질감 때문에 중동의 어느 국가로부터도 보호 내지는 지원을 받고 있지 못하다. 더욱이 쿠르드족은 그 스스로 자신들이 거주하고 있는 국가에 동화되기보다 분리 독립을 추구하면서 조직적 무장 폭동과 테러에 나서고 있기 때문에 해당 국가들의 경계와 학살 대상이 되고 있다. 일부 국가는 국민들의 정부에 대한 불만이 고조되면 이를 쿠르드족 박해로서 완화시키려고 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쿠르드문제는 이미 팔레스타인문제와 함께 중동지역 정세의 최대 불안요인 중의 하나가 되고 있지만, 쿠르드인들이 여러 국가에서 집단적 난민촌을 형성하고 살면서 국경을 넘어 외부에 지원세력과 거점을 가지고 있어 쿠르드문제는 국제화의 가능성을 안고 있다. 쿠르드족은 어느 한 국가 또는 지역에 거주하지 않고 또 대규모의 인명 피해와 난민이 발생되고 있기 때문에 유엔을 포함한 국제사회의 인도주의적 지원을 크게 필요로 하고 있다. 쿠르드족 문제가 계속 악화되어 유엔이 개입할 경우 한국도 유엔의 인도주의활동에 참여할 가능성이 있다.


쿠르드족이 자신의 민족적 정체성을 포기하고 해당 국가 내에 동화되어 살지 않는 한 분쟁은 계속될 수밖에 없다. 쿠르드족과 해당 국가는 근원적으로 대립적인 관계를 유지할 수밖에 없으며, 그로 인한 분쟁은 해결이 거의 불가능할 것으로 전망된다. 쿠르드족은 중동지역 국가들의 지원을 받고 있지 못할 뿐만 아니라 국제사회도 그 문제가 내정에 가까운 것이기 때문에 인도주의적 지원 외에는 달리 지원해 줄 방법이 없다. 또한 쿠르드족 문제는 여러 국가들이 직접적으로 관련되어 해당 국가들마다 정치적 상황과 쿠르드족에 대한 노선과 정책이 다르기 때문에 풀기가 어렵다.


쿠르드족의 독립국가를 이루는 것은 아직 실현가능한 목표로 보이지 않고 또 바람직한 목표인지 검토가 필요하다. 하지만 적어도 쿠르드인이 속한 나라에서의 자치와 자유는 실현가능하고 또 실현되어야 한다. 오는 3월 21일은 쿠르드인의 설날 나루즈(새날)이다. 죄가 많은 곳에 은혜가 더하고 어둠이 깊은 때 새벽이 가깝듯이 고난이 많은 쿠르드 민족에게서 우리는 희망의 빛을 보아야 한다. 중동땅과 세계에 디아스포라된 쿠르드인들을 통하여 하나님은 중동과 세상에 새날을 주시려는 것은 아닐까. 벌써 쿠르디스탄 지역이 열리고 많은 하나님의 일꾼들이 필요하다는 보고들이 들어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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