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쿠르드

쿠르드족

큰봄까치꽃 2012. 11. 13. 11:47

쿠르드족 서양사

2006/11/06 13:02

http://blog.naver.com/iris829/110010565416


1. 쿠르드족의 현황

쿠르드족은 3000만 이상의 인구로서 자신의 민족국가를 가지지 못한 세계 최대의 민족그룹이다. 터키, 이란, 이라크, 시리아, 구소련에 접하는 쿠르디스탄 지역을 중심으로, 전체 인구의 절반 가량인 1,600만 명이 터키에, 600만 명은 이란에, 500만 명은 이라크에, 100만 정도가 시리아에 거주하고, 그 외에 레바논, 아르메니아, 아제르바이잔, 영국, 독일, 스웨덴, 네덜란드, 프랑스, 호주, 미국 등 유럽과 세계각지에 흩어져 살고 있다. 북쪽과 북동쪽으로 평균고도 해발 3500미터의 스텝과 같은 고원 산악지대, 티그리스강과 유프라테스강의 수원지가 되고 있는 거대한 반(Van) 호수 북쪽 평원지역, 이라크 북부의 유전지대로 구성되는 쿠르디스탄 지역은 석유 등의 지하자원과 수자원의 보고이며 농경에 좋은 땅으로서 주변 강대국의 분할통치의 대상이 됨으로써 쿠르드족의 독립이 방해되고 있다
한국에도 터어키, 이란, 이라크, 시리아 출신의 쿠르드인들이 들어와 있으며, 특히 이라크 출신의 쿠르드인들은 이라크 사담 후세인 정권의 인권침해와 쿠르드인에 대한 박해로 인하여 본국에 돌아갈 수 없는 형편으로 한국정부에 난민지위를 신청한 바 있다.


2. 쿠르드족의 역사

(1) 근대이전

BC 3000년경 메소포타미아 비옥한 초생달 지역에서 발상한 인류 최초의 농경문화인 수메르 문명과 메소포타미아 문명은 북쪽 쿠르디스탄 산악지대에 부족별로 촌락을 이루고 살았던 민족들을 자극하여 쿠틸(Qutil), 만나(Manna) 등의 도시국가를 이루게 한 것이 쿠르드지역 문명의 시초이다. 이들 쿠르드 도시 국가들은 메소포타미아와의 잦은 전쟁으로 파괴되었으며, 기원전 1200-900년 사이에 아리안족이 이 지역에 이주하여 쿠틸인들을 비롯한 산악민족들은 아리안화되었다. 쿠틸인으로 불린 산악민족과 아리안족이 함께 동화되어 새로운 아이덴티티를 갖게된 쿠르디스탄지역 사람들은 기원전 727년에 메데왕국을 형성하였고 전 중동을 정복하였다. 이때 니느웨를 비롯해서 바빌론, 앗시리아 등 성경에 멸망이 예언된 국가들이 파멸되었다. 마지막 왕인 Rshti-vega Azhi Dahak(584-549)는 아들이 없어서 그의 딸을 페르시아 장군에게 주었고 그들 사이에서 난 외손자 가 메데-파샤제국을 세운 키루스(Cyrus, 구약성서의 고레스)왕이다. 현대 쿠르드에 남아있는 메데인의 흔적은 지명에 붙은 mah 또는 mai인데 이것은 메데를 뜻한다. 이 시기 이 지역의 천사(사탄)숭배는 초기 조로아스터교의 태동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BC 3세기에 페르시아는 파르티아라는 이름의 연방국으로 형성되었는데, 그 연방 안에서 쿠르드인들은 타민족의 오랜 지배하에서 벗어나 반독립을 이루게 되었다. 이 당시 쿠르드인들이 세운 쿠르드 공국 중에는 Adiabene, Pontus, Cappadocia, Commagene 등이 있었는데. Adiabene은 오늘날 이라크의 아르빌에 세워졌던 공국으로서, BC 1세기경 많은 귀족들이 유대교로 개종한 바 있었고, AD 4세기경까지는 이 지역의 대부분이 기독교로 개종되기도 하였다. Pontus, Cappadocia, Commagene는 아나톨리아 중서부에 있었던 공국인데, 세력이 팽창하여 에게해를 넘어 유럽대륙까지 진출하여 로마제국과 부딪히기까지 했다. BC 57년에 서부의 3개 국가가 로마에게 정복당하였고 유프라테스를 경계로 로마와 파르티아가 접경하게 되었다. 고대로부터 서부쿠르드인들의 고향인 안디옥 주변의 아마누스 산지에 사는 쿠르드인들은 셀루키드왕국 당시에 안디옥에 정착해서 살았고 로마가 들어왔을 때, 로마 행정관들과 강한 유대관계를 가지고 사산조 페르시아의 침입때에는 이 지역 방어를 돕기도 했다. 이 시대에 그리스-로마의 만신전 판테온이 쿠르드인들에게 전래되었다. AD 3세기에 파르티아제국이 패망하고 사산조 페르시아 제국이 일어났다. 이 당시 자그로스 남동부로부터 많은 수의 쿠르드인들이 아나톨리아로 이동하였다. 이 이동은 쿠르드의 동일화와 통합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이 이동을 통해 천사숭배가 공유되었고 문자, 예술, 등이 동일화되었다.

7세기에 이슬람이 발흥하고 아랍세계가 정복전쟁에 나서자 반(Van), 하카리(Hakkari) 등 쿠르드 지역이 아랍군에게 정복당하여 쿠르드인들은 이슬람을 받아들이기 시작했고 쿠르드는 최초로 이슬람으로 개종한 이민족이 되었다. 그 후, 우마이야 왕조, 압바스 왕조의 아랍제국을 거쳐 튀르크족의 셀죽, 티무르, 오스만 제국의 통치하에 놓이게 되었다. 11세기 말 압바스 왕조의 쇠퇴를 틈타 수많은 쿠르드 공국들이 난립하여 일시 독립을 이루기도 하였으나 이러한 간헐적인 독립은 중앙 세력이 약할 때 주위 세력과 연합해서 이루어낸 자치일 뿐이었으므로 쿠르드인들은 계속해서 타민족의 지배를 당하였다. 결국, 1639년 오스만 제국의 술탄 무라드(Sultan Murad)와 사파비조의 샤 압바스(Shah Abbas) 사이에 맺어진 국경선 조약을 통해 쿠르디스탄 지역은 상이한 두개의 구역으로 양분되는 운명을 맞게 되었다. 이때부터 쿠르디스탄에는 고립된 산악지대를 중심으로 수많은 부족적 자치소국(自治小國)이 등장했으나, 19세기까지는 터키, 이란, 러시아 간의 지리적 완충지대의 기능에 머물렀다.

(2) 근대이후

19세기에 들어 서구의 본격적인 침략과 함께 쿠르드족의 강력하고 조직적인 반란이 1826-1880년까지 계속되었다. 최초로 쿠르드인의 정치적 민족주의가 발아하는 시기는 1880년이었다. 이 해 쿠르드 족장 쉐이크 우베이둘라(Sheikh Ubaidullah)가 이란을 침공한 대가로 오스만 정부로부터 쿠르디스탄의 일부를 할양받았고 이란 영내의 쿠르디스탄에 일종의 쿠르드 민족국가를 설립하였다. 그는 8만의 강력한 쿠르드 연합군을 결성해서 계속해 이란을 침공하여 마하바드(Mahabad)를 점령하고, 한때 우르미아(Urmia)호수의 서안, 레자이 지역까지 진격했으나 앗시리아 네스토리우스 교도의 저항과 이란 정부군의 반격으로 민족국가 창설의 꿈을 실현시키지 못했다. 그러나 우베이둘라의 민족국가 창설 이념은 이후 쿠르드 민족주의 탄생의 기폭제가 되었다.

1차 세계대전때에 쿠르드족은 이슬람 형제라는 이름으로 터어키군에 편입되어 터어키에 이용당하였고, 러시아와 터어키 사이의 전쟁은 터키의 쿠르드인들과 기독교 아르메니아와의 대리전이 되었다. 1차 세계대전 이후 쿠르디스탄은 터키, 이란, 이라크, 시리아, 소련 등 5개국에 편입됨으로써 분리되고 말았다. 1920년 세브르조약은 쿠르드의 자치권을 보장했으나, 1923년 로잔조약에서는 터어키의 반발과 영국의 이권에 의해 쿠르드 문제가 언급조차 되지 못하였다. 쿠르드 민족운동은 2차 대전 이후 소련이 이란을 점령했을 때 다시 일어났다. 소련의 도움을 받아 1946년 1월 24일 마하바드에서 카지 무함마드를 대통령으로 쿠르드 공화국이 세워졌으나 채 1년이 되지 못하여 소련의 묵인하에 이란 정부군에 의해 무참히 짓밟혔다. 쿠르드족이 이란, 이라크, 터어키, 크게 3개국으로 편입되면서 쿠르드 독립운동의 장애물도 각각 이들 중앙정부의 정책에 의해 달리 나타나게 되었다. 쿠르드인들은 현재 독립운동을 다각적으로 진행시켜나가고 있다. 95년 4월에 헤이그에 망명의회를 설립하고 각종 국제기구에서 쿠르드족을 대표하게 될 것을 선포하였다. 쿠르드 위성방송 MED TV가 95년 3월 영국에 세워져서 하루에 3시간씩 쿠르드어 방송을 시작하였으며, 이 방송이 쿠르드 반군에게 힘을 더해 주고 있다.


3. 각국 쿠르드족의 현황

(1) 터키 쿠르드족

터키 건국자인 무스타파 케말은 공화국 초기부터 Kemalism으로 통칭되는 터키화 정책을 취하여 쿠르드족의 주권을 말살하였다. 1991년까지 쿠르드어는 어떤 용도로든지 사용이 금지되었으며 쿠르드인들은 '산악 터키인'이라 불렸다. 이러한 터키화 정책에 의해 많은 터키 쿠르드인들이 터키 민족에 동화되었고, 초기의 민족저항운동은 사그러들었다.

그러나 1984년부터 쿠르디스탄 노동당(PKK)의 민족저항운동이 시작되어 정부군과 내전에 돌입해서 지금까지 이르고 있다. 이 전쟁은 터키 국가 발전에 커다란 위협과 손실을 가져다 주고 있어 터키의 가장 큰 사회 이슈중에 하나이다. 쿠르드 민족 정치세력 외에 일반 쿠르드인들은 터키에 동화된 채로 살고 있다. 한편 이러한 일반 쿠르드인들이 정부에 반하는 감정을 가지는 이유는 쿠르드인들이 집중적으로 거주하는 터키 동남부의 경제적 저개발이다. 이러한 사회적 여건은 PKK를 지원하는 한 요소이다. 현재 터키 쿠르드인들은 유럽과 미국 등지에서 국제사회에 쿠르드 문화와 터키 쿠르드인들의 인권 상황을 알리면서 쿠르드 문제를 국제 여론화시키는 일들을 활발하게 전개하고 있다.

(2) 이라크 쿠르드족

이라크의 쿠르드족은 민족의 주권을 가장 많이 인정받은 쿠르드족 집단이다. 1970년 정부와의 자치 협상에서 쿠르드어 교육과 교육어로서의 쿠르드어 사용이 허용되었으며 이라크 정부는 1974년 자치법을 공표하여 이라크 북부의 쿠르드 지역에서 쿠르드족이 자치를 누릴 수 있도록 하였다. 그러나 이라크 쿠르드족은 자치지역내에 키르쿡(유전지대)이 포함되지 않은 것에 불만족하여 저항운동을 시작하였다. 실제로 정부의 조치들은 중앙정부의 권력을 강화하기 위한 회유정책에 불과하였으며 자치법마저도 실제적인 쿠르드족의 자치라고 볼 수 없을 정도였다.

이라크 정부는 회유책에도 불구하고 쿠르드족의 민족 저항운동이 제압되지 않자 1975년부터 쿠르드족에 대한 강경 정책을 취하기 시작하였다. 이란-이라크 전쟁에서 미국이 이란의 이라크 공격을 묵인해 주면서 이라크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서 이란에게 쿠르드반군을 원조하도록 부추기자 이라크의 사담후세인은 1987년부터 1989년 사이에 안팔작전(Operations Anfal)이라는 쿠르디스탄 초토화 작전에 나서 4,000개 이상의 쿠르드족 촌락을 초토화하였으며 수십만 명을 학살하였다. 특히 이 안팔작전 기간인 1988.3.에 사담 후세인은 화학무기를 사용하여 할랍자 마을 전주민 5000여명을 5분 안에 즉사시켜 세계를 놀라게 하였다. 이 사건은 전체 8회에 걸쳐 진행된 안팔작전의 일부에 지나지 않았고, 1988년 1년간 진행된 안팔작전에서만 쿠르드족 민간인이 10만 명 이상 죽었고 수백만의 난민이 발생하게 되었다.

1990년 걸프전을 계기로 1991년에 대규모 쿠르드 독립운동 일어났고 이라크군은 다시 한번 의 강경 진압으로 250만 명의 난민이 발생시켰다. 이 때 발생한 난민들이 세계 각국에 흩어져 우리나라에까지 오게 되었고, 대부분은 현재까지 터키와 이란의 국경지대 천막촌에서 국제 구호기구의 구호물자로 생명을 연명하고 있다. 걸프전을 계기로 북위 36도 이북의 쿠르디스탄지역은 비행금지구역으로 설정되어 이 지역 쿠르드인들은 서방의 도움으로 자치 정부를 꾸려나갈 수 있게 되었지만, UN의 대이라크 무역 제재조치로 이라크지역내 어린이들이 하루에 4000명씩 죽어가는 심각한 상황에서 쿠르드족 어린이들은 이보다 훨씬 어려운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그러나 민족 국가가 없는 이라크 쿠르드족은 자체 내의 내분으로 민족의 상황을 더욱 어렵게 하고 있다.

(3) 이란 쿠르드족

이란 쿠르드족은 20세기에 들어 팔레비 왕정 치하에서 심하게 탄압받았다. 그래서 1979년 호메이니 이슬람 혁명은 이란의 쿠르드족에게 큰 희망을 주었고 쿠르드인도 이 혁명을 도왔다. 그러나 호메이니 정권은 혁명에 열렬하게 동조했던 쿠르드족의 열망을 무시하고 말았다. 호메이니 정부는 범이슬람 주의를 내세워 소수민족의 주권을 인정하지 않았다. 이슬람 주의는 민족적 구별, 사회 계층적 구별 없이 무슬림으로서 모두가 평등하다는 논리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민족의 주권을 주장하는 쿠르드족을 용인할 수 없었다.
현재 이란은 이라크 쿠르드족 난민들을 위해 가장 활발히 구호 활동을 하는 나라이며 이러한 활동들을 통해 이란의 이슬람 주의를 쿠르드족에게 전파하고 있다. 이란 국경지대의 쿠르드족 사회에는 현재 이슬람 부흥 주의가 크게 확산되고 있다. 반면 이란 내의 쿠르드족의 민족 저항운동에 대해서는 강력하게 탄압하고 있으며 쿠르드족 민족운동가들에 대한 테러를 자행함으로써 국제적인 테러 국가의 악명을 유지하고 있다.

이란의 마하바드에서는 과거 1946년에 쿠르드 국가가 1년간 수립되었던 적이 있다. 현재 마하바드는 세넨다즈와 함께 이란 쿠르드지역의 중심도시이다. 이란은 역사적으로 쿠르드족의 독립운동에 대해 지도자를 암살하는 수법으로 대항했다. 이러한 전략은 유효하여 현재 이란내에서 쿠르드족의 민족주의 운동은 수그러들었고 겉으로 보기에 평안해 보인다.

이란은 쿠르드족 선교에 있어서 관문국가라고 할 수 있다. 먼저 이란의 국어인 페르시아어는 쿠르드어와 같은 친족언어이며 이란인들은 쿠르드인들과 인종적으로도 가깝다. 또한 역사적으로 문화적으로 많은 부분을 공유한다. 이란의 쿠르드족은 크게 두 지역에 거주하고 있다. 이란의 서부와 이란의 북부 호라산 지역이다.


4. 쿠르드 선교

쿠르드족은 구약성경과 신약의 사도행전에 등장하는 메데(Medes)인의 후손으로서 7세기에 이슬람화된 이래 이슬람안에서 자신들의 정체성을 유지해오고 있다. 십자군으로부터 이슬람 제국을 보호하고 예루살렘을 탈환해서 전 무슬림들의 추앙을 받고 있는 살라딘 장군이 쿠르드족 출신이다. 이슬람화 된 이후 쿠르드족 은 20세기가 되기까지 복음을 전하려는 어떤 선교사나 교회의 기도나 전도를 받아보지 못하였으며 현재까지 쿠르드족 선교를 하는 선교사나 교회도 역시 손에 꼽힐 정도로 적은 실정이다. 3000만 명이나 되는 쿠르드족 안에 알려진 기독교인의 수는 100여명에 지나지 않으나 이 중에는 터키화된 쿠르드족이 포함되어 있기도 하여 쿠르드 민족의 복음화를 위한 인력은 턱없이 부족한 실정이다. 쿠르드족이 처한 이러한 정치적, 사회적 영적 환경으로 말미암아 쿠르드족은 세계에서 가장 복음화되기 어려운 지역으로 분류되고 있다.

쿠르드족은 크게 4개의 언어권으로 분열되어 있으며 이 언어들은 서로 의사소통이 불가능할 정도의 방언으로 변화하였다. 이러한 언어적 분열과 함께 쿠르드족은 부족과 부족 연합들로 대립적인 생활을 하며 이들 간에 반목이 있고, 수 백년에 걸쳐 내려오는 '힌다리'라는 부족간의 복수전이 쿠르드족 내부의 부족간 분열의 심각성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분열은 쿠르드족이 민족국가를 가지지 못하게 하는 절대적인 요인임과 동시에 복음 전파에 커다란 장애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그리고 쿠르드 전통의 부족사회는 외부에 대한 강력한 배타성과 내부적으로는 강력한 일체성을 가지고 있어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쿠르드족 개인은 일반적인 무슬림 사회에서 보다 더욱 큰 어려움을 겪게 된다.

쿠르드족은 이슬람을 받아들이기 전에 토착 종교인 천사숭배 (사탄 숭배)와 조로아스터교(배화교), 기독교 등의 종교를 가지고 있었으며 이슬람을 받아들인 후에도 이슬람 이외에 이들 종교를 혼합한 형태의 알레비즘을 비롯하여 사탄을 숭배하는 야즈디교 등의 종교를 가지게 되었다. 쿠르드족은 각 부족마다 물라와 쉐이크들을 가지고 있어 이들이 부족민의 이슬람 교육을 담당한다. 이 두 세력가는 쿠르드족 사회에서 최고의 영향력을 가진 사람들로서 신접하는 체험을 중요시하는 수피주의 교단의 지도자들이다. 이러한 모든 영적 세력들은 쿠르드족 선교에 커다란 장애가 되고 있다.

그러나, 20세기에 들어 주위 이슬람 국가들로부터의 탄압은 쿠르드인들이 기독교로 마음을 열게 한 결정적인 동기를 제공해 주었다. 특히 쿠르드족은 구약에 등장하는 하나님을 경외하였던 이방인인 고레스와 다리오 왕의 후손이다. 그들의 조상이 경외하였던 하나님께로 돌아가기를 주장하는 일부 지식인들의 주장은 복음 전파에 중요한 가교가 되기에 부족함이 없다. "성경 속의 쿠르드족" 이라는 책이 현재 쿠르드족의 관심을 끌고 있으며 이것을 매개로 한 선교가 효과를 거두고 있다는 소식이 있다. 현재 쿠르드족 사역을 위해 여러명의 사역자들이 터키 동남부에 거주하고 있으며, 서서히 이란지역에도 쿠르드 사역자가 파송되기에 이르렀다. 현재까지 가장 접근이 어려운 쿠르드인 거주지역은 이라크로 관측되고 있다.

'종교 > 쿠르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쿠르드 애국동맹  (0) 2012.11.13
세계의 갈등|쿠르드족  (0) 2012.11.13
쿠르드족의 역사와 인권 현황  (0) 2012.11.13
쿠르드족(Kurds)  (0) 2012.11.13
쿠르드족  (0) 2012.11.13